둘째 인(중추부사)은 무남 독녀로 공의 외손자(나주오씨)들과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지금도 외손봉제사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,
셋째 훈(호;월당. 훈련원봉사)이신데 1남3녀를 두셨다
용장문중은 양(호;춘헌. 장사랑. 용장마을)과 훈(훈련원봉사)의 후손(반룡마을)들이다
양께서는 2남4녀를 두셨는데 큰아들 덕민(호:사재. 의사공) 아들 귀생(호;영모)은 1남3녀를 두셨고 외아들 지수(인천공)께서는 4남3녀를 두셨는데 큰아들 유태(호;화수정)과 둘째 우태(호;북창)의 후손들은 용장마을에 많이 살고 있으며 셋째 익태(호;장강)의 후손들은 양사동(강냉기,즉 강넘어)마을에서 살고 있다,
양의 둘째 아들 신민(통덕랑)께서는 2남을 두셨는데 큰아들 귀중(호;시암공)은 동생 귀용(가선대부)의 첫째아들 지형(호;임고당)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하여 귀용(가선대부)의 둘째아들인 지영(호;송천)과 그 후손들이 대를이어서 목우마을에 살고있다.
응성(호;갈천. 선무랑, 증이조좌랑) 즉 신산,입암,남계문중은 외아들 흔(호;장봉)께서 인조조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웠고 1남3녀를 두셨는데 외아들 기종(호;호은.증호조참판)께서 병자호란시에 의병으로 출사하여 청주까지 진격하였는데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에 절망하여 귀향한 후에 공음면 송림산에서 평생을 은거 하셨고 공께서는 2남 3녀를 두셨으며 그 후손들께는 대산면 갈마곡, 남계리,입암리, 신산리등지에서 많이 살고 있는데 대동보에는 송운파로 기재되어 있다